나도 예전에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있었던 금융상품의 용도에 대해서 하나씩 적어볼까 한다. 여러 가지 시행착오와 경험으로 생긴 개념으로 검색하면 나오는 공식적인 정의와는 거리가 멀다. 그냥 이런 식으로 개념을 잡고 이해하는 게 실제적인 도움이 되기에 이렇게 정의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가장 밑바탕이 되는 생각은 열역학에 기반한다. 에너지는 새로 생기거나 없어지지 않고, 엔트로피는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 엔트로피에 대한 본질적인 이해가 있으면 가장 좋지만 이 글과는 거리가 있으므로 결과만 가지고 쓸까 한다. 엔트로피를 이해하는데 최근에 가장 도움이 된 관점은 "인투 더 쿨"이라는 책에 소개된 "자연은 구배 차이를 혐오한다"이다. 읽기 무척 어려운 책이지만, 위의 한 문장만 이해한다면 세상을 이해하는데 상당한 도움이 된다.
아무튼, 인투 더 쿨의 관점으로 이해하기 시작하니, 예전에 알고 있던 개념들에 대해서 내가 오해하고 있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예금, 정기예금, 적금은 돈을 불리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이자가 있어도 마찬가지다. 이 금융상품은 돈을 불리는 용도가 아니다. 이 상품들은 잉여 가치의 자연손실을 최소화해주는 금융상품이다. 잉여가 생기는 과정은 생략하고, 어쨌든 남는 돈 100만원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리고 두 가지 경우를 생각해보자.
바지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100만원과 1년짜리 정기예금에 넣어둔 100만원.
이제 1년 후 그 100만원들이 잘 있을지를 상상해보자. 사실 너무 쉬운 상상이다. 바지 속에 넣고 다닌 100만원은 90% 이상 확률로 한 푼도 없을 것이고, 정기예금에 넣어둔 100만원은 불상사로 쓸 돈이 생겨 정기예금을 깨지 않는 이상 1만원 정도의 이자와 함께 남아 있을 것이다.
물론 사라진 100만원을 더 가치 있는 것에 사용했을 수도 있다. 합리적으로 소비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점은 결국 주머니 속에 넣어둔 100만원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어떤 식으로든 사라진다는 것이다. 현대는 공급이 수요를 초과하는 시대이기 때문에 초과 공급된 상품을 소비하라는 압력이 도처에 넘친다. 공급자측에서는 기본적으로 일정 수준 이상의 압력을 시장에 가하기 때문이다. 그런 압력에 주머니 속의 돈이 무방비로 노출되면 일정 확률로 상품과 돈이 교환된다. 물론 교환 확률은 개인의 성격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아무리 구두쇠라도 확률이 0%는 아니다.
반면, 정기예금에 넣어둔 100만원은 인위적인 방어벽 안에 있게 된다. 이 방어벽으로 인해 돈과 상품의 교환 확률은 극적으로 낮아진다. 길을 걷다가 미칠 듯이 맛있는 간식 냄새를 맡는다고 해도, 간식 때문에 정기예금을 깨는 일은 사실상 일어나지 않는다. 정기예금을 깰 정도의 일이라면 꼭 필요한 일일 가능성이 높고 그런 일이라면 깨는 게 맞다. 하지만 어지간한 일이면 정기예금을 깨지지 않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1년 후 100만원의 가치는 남아 있을 가능성이 90% 이상이 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 글에서 설명하려는 금융상품들의 용도가 어느 정도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예금, 정기예금, 적금의 용도는 잉여가치를 지키기 위한 것이다
예금, 일단 언제든지 빼서 쓸 수 있기는 해도 어쨌든 주머니 안의 돈 보다는 쓰는 데 번거로운 절차가 필요하다. 내 돈을 어느 정도 지켜줄 수 있다. 물론 예금에 체크카드나 신용카드를 연결하면 돈을 지키는 방어벽은 무용지물이 된다. 카드는 돈과 상품의 교환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도구다. 목적에 따라 도구를 어떻게 사용하느냐는 본인이 판단하면 된다.
정기예금, 내 돈을 자연적인 손실로부터 지키기 위한 강력한 방어벽이다. 상당히 번거로운 절차를 진행해야만 돈을 쓸 수 있지만 그렇다고 꼭 필요할 때 쓸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정기예금을 해지하면 위약에 따른 이자 손실이 있는데, 이 손실이 심리적 장벽을 조금 더 높여 준다. 정기예금은 손해보지 않으려는 본능을 좋게 활용할 수 있게 해 준다.
적금, 매달 발생하는 잉여를 효과적으로 축적할 수 있는 수단이다. 작은 잉여는 정기예금이라는 상품에 담아두기 애매한데, 적금은 작은 잉여에 대해서 정기예금의 효과를 줄 수 있다.
추가로 적을 것이 두 가지 더 있다. 금리 그리고 잉여다.
혹시나 고금리 시절에는 정기예금도 돈을 불리는 수단이지 않았나 싶을 수도 있다. 하지만 고금리 시절에는 그만큼 경제성장률이 높았고 그 만큼 물가상승률도 높았다. 1년이 지나면 평균적으로 그 만큼 돈의 가치는 떨어지게 된다. 그러니까 최소한 정기예금 정도의 수익률을 내야 내 돈의 가치가 유지된다는 말이다.
다음으로 정기예금이 돈의 가치 손실을 막아주는 도구로써 기능하려면 지키려는 돈이 잉여자금, 그러니까 남는 돈이어야만 한다. 극단적인 예시를 들자면, 다음 주에 핸드폰 요금으로 내야 할 돈이 있는데 그 돈을 정기예금에 넣어 두면 오히려 손실이 난다. 가입하고 해지하는 시간 손실, 제시간에 납부 못하면 연체금 발생. 물론 극단적인 예시다.
결국 하고 싶은 이야기는 '돈을 모으고 싶다'면, 가장 먼저 '남는 돈'이 필요하고, 그 남는 돈이 손실되는 것을 효과적으로 막아주는 도구로 쓸 수 있는 금융상품이 "예금, 적금, 정기예금"이라는 것이다. 돈을 모으고 싶지 않거나 남는 돈이 없다면 위의 이야기는 아무 쓸모가 없다. 자기가 번 돈 쓰면서 살고 싶다는 분들의 생각도 가치 있고 존중받아야 한다. 하지만 돈을 모으고 싶다면 어쨌거나 남는 돈을 만들어야 하고, 그것이 자연적으로 없어지지 않게 하려면 예금, 적금, 정기예금 같은 도구를 사용해야 한다. 쓸 돈 다 쓰고 돈을 모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에너지는 새로 생기거나 없어지지 않고, 엔트로피는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
불황에 정기예금 금리가 최저 수준인데도 예금에 역대 최대 수준으로 돈이 몰리는 데는 이유가 있다. 돈을 모으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손실에 대한 저항성향이 강하고 돈을 지키는데 효과적인 도구를 활용할 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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