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읽은 책에서 뜻밖에 흥미로운 개념을 발견했는데, 바로 게으른 독점(Lazy Monopoly) 전략이다. 이 개념을 "떠날 것인가 남을 것인가"라는 책에서 처음 접했을 때, 머릿속에 바로 떠오른 것이 애플이었다.
자본주의와 자유시장경제 체제의 사회에서는 일반적인 의미의 독점전략을 사용할 수 없다. 기업 입장에서 독점전략을 취했을 때 얻는 이익보다 손실이 크기 때문이다. 독점전략을 사용하여 실제로 독점이 가시화되기 시작하면 사회적 반작용으로 기업이 아예 사라지거나 쪼개지는 위험에 내몰리게 된다. 이 상황에 진입하면 이윤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래서 기업들은 다른 전략을 사용하는데 그게 바로 게으른 독점 전략이다. 일단 제품이나 서비스의 경쟁력이 있어야 한다. 이건 기본이다. 경쟁력 있는 제품으로 고객군이 형성되면 게으른 독점 전략이 작동한다. 어느 정도 규모가 되는 고객군이 생기면 그중에는 필연적으로 요구사항이 까다로우면서도 쉽게 제품을 바꾸는 혹은 바꿀 수 있는 고객들이 있게 마련이다. 이런 고객들은 비용이 많이 드는 고객이다. 제품의 특성과 맞지 않는 기능이나 보편적으로 많이 쓰이지 않는 개인적 필요에 의한 기능을 요구하여 비용을 증가시키기도 하고, 요구사항 자체가 많아서 응대 비용 자체를 높이기도 한다. 또 제품에 맞지 않는 사용으로 사후 비용도 증가시킨다. 시장점유율 확대를 위한 프로모션의 체리피커일 가능성도 높다. 게으른 독점 전략을 쓰는 기업은 이런 고객에 대해 특별히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이 전략에서는 이것 만으로도 충분하다. 대체할 수 있는 제품과 서비스가 있기 때문에 경계선 근처의 고객은 경쟁사로 떠난다. 남은 고객은 남은 고객대로 점차 적응한다. 한마디로 돈 되는 고객은 남기고, 돈 안 되는 고객은 경쟁사로 보내는 것이다. 여기서 기업은 제품의 경쟁력을 높이는 일 외에는 적극적으로 하는 것이 없기에 이 전략은 "게으른" 전략이 되고, 결과적으로 특정 고객층을 대부분 가져오기에 "독점" 전략이 된다.
사실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 기업들이 이런 전략을 어떤 의도를 가지고 쓰는 건 아니다. 앞에도 적었지만 제품의 경쟁력이 없으면 그 자체로 무의미하다. 돈 되는 고객도 쓸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게으른 독점은 기업이 제품 자체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 아래에서 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현상에 가깝다.
세포단위에서도 불필요한 화학반응에 에너지를 낭비하여 정상적인 생체기능의 효율성을 높이지 못하면 개체 단위의 운명에 악영향을 준다. 개별 개체나 종도 상대적으로 분쟁에 노출되는 경향이 높을수록 미래가 암울해진다.
권위 있는 생태학자들이 쓴 책들을 보면 야생의 생태계가 상대를 압도하지 못하면 살아남지 못하는 치열한 생존경쟁이 일어나는 곳이라는 생각이 틀렸다는 걸 알 수 있다. 야생의 개체나 종들은 각자 차지하고 있는 생태적 영역 외의 영역을 가급적 침범하지 않는다. 설사 침범하는 경우가 발생해도 대부분은 침범하는 쪽에서 물러나기 때문에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지는 싸움이 일어나는 경우는 드물다. 물론 이 드문 이벤트가 재밌기 때문에 미디어를 통해 우리가 접하는 내용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야생의 생태계를 피 튀기는 싸움을 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는 곳으로 인식하지만 대부분의 생명들은 싸움을 최대한 피하는 전략을 따르고 있다. 물론 경쟁하는 부분도 있는데 생명이 하는 실제 경쟁은 아직 아무도 차지하지 못한 영역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 누군가 피 튀기는 싸움을 하면서 생긴 빈틈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다.
지구 상에서 자본주의와 자유시장경제가 가장 발달한 미국의 기업들을 보면 이런 경향이 확실하게 보인다. 물론 미국 기업들도 일반적인 의미의 경쟁도 하긴 한다. 하지만 필요 이상으로 큰 싸움은 아니다. 경계면에서 일어나는 불가피한 현상 정도다. 대신 미국의 기업들은 아직 아무도 차지하지 못한 시장을 먼저 차지하기 위한 경쟁에 몰두한다. 그리고 각자 어느 정도 영역을 차지하면 자신이 차지한 영역에 적합한 고객을 위한 제품과 서비스에만 집중한다.
대만의 대표적인 기업인 TSMC는 벽에 "고객과 경쟁하지 않는다"라는 문구를 걸어 놓았다는 사실을 얼마 전에 알았다. 비로소 TSMC가 어떻게 이렇게까지 성장할 수 있었는지 이해됐다. TSMC도 분명 과거에 특정한 기능을 가진 반도체를 설계까지 해서 만들어 달라는 요청을 수없이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요청은 거부했을 것이고 그 고객은 경쟁사로 갔을 것이다. 벽에 걸려 있다는 문구를 보면 확신할 수 있다. TSMC가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반도체 위탁생산 시장도 처음에는 틈새시장이었다. 해당 영역에 먼저 뛰어든 기업들 중 하나였고, 해당 영역의 제품의 경쟁력을 높이는데 집중하여 결과적으로 독점적 지위에 올랐다.
앞에 쓴 애플도 마찬가지다. 애플은 자사의 제품과 서비스에 대한 적응성이 높은 고객을 고객으로 삼는다. 고객에 맞춰주길 원하는 고객에 대한 대응은 사실상 없다고 봐도 무방해 보인다. 자연스럽게 특정 연령층 이상의 고객과 까다로운 관리가 필요한 고객은 경쟁사로 가게 된다. 이것이 특정 연령층과 계층이 사용하는 제품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고객들로 하여금 기꺼이 높은 가격을 치르게끔 만든다. 그리고 높은 가격은 다시 제품의 이미지를 강화하는데 영향을 준다. 결과적으로 애플은 스마트폰 시장을 사실상 독점하는 지위에 올랐다. 판매량이나 매출을 보면 독점이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특정 연령층 이하나 특정 계층으로 따져보면 과반 이상을 차지하는 독점에 가깝다. 무엇보다 스마트폰 시장 전체 이익에서 애플이 차지하는 비중을 보면 사실상 독점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애플은 앞으로도 경쟁사의 까다롭고 비용이 많이 드는 고객을 뺏어오기 위한 낭비가 심한 경쟁은 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런 경쟁을 하기 시작한다면 기울기 시작했다는 뜻이 된다.
게으른 독점 전략은 관점을 바꾸어 보면 블루오션 전략과 같은 전략이다. 둘은 동일한 메커니즘을 다른 방향에서 보고 붙인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 지금 떠오르는 동일한 메커니즘을 다룬 다른 분야의 책이 하나 있는데, "운을 읽는 변호사"라는 책이다. 개인적인 경험을 토대로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관해 쓴 책인데, 이 책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한마디로 "다투지 마라"이다. 나쁜 마음을 먹고 다투기 시작하면 좋은 운이 달아난다는 식으로 전형적인 동양적 세계관으로 쓴 책이다. 다툼에 집중하면 자기 일에 소홀해질 수밖에 없다. 역시나 관점은 달라도 실제 메커니즘은 동일하다.
게으른 독점의 개념만 적어볼까 했는데, 적다 보니 많이 길어졌다. 기업을 이런 식으로도 볼 수 있구나 하는 정도만 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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